— 바둑기사, 주마등, 그리고 ‘기억의 밀도’라는 착각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그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물리학적으로 시간은 누구에게나 거의 동일하게 흐른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같은 시간을 전혀 다르게 느끼는가?
1. 시간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된다
중요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느끼지 않는다.
시간은 항상 ‘사후적으로’ 해석된다.
즉,
-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아, 지금 1초가 길다”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 사건이 끝난 뒤, 기억을 되짚는 과정에서“와… 엄청 긴 시간이었던 것 같아”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기억의 밀도다.
2. 기억의 밀도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단순한 정보량이 아니다.
기억에는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종류가 있다.
① 경험 기억 (체감 시간을 만든다)
- 감정
- 공포, 놀람, 감동
- 자아 서사 (“내가 겪었다”는 느낌)
👉 이 기억이 많을수록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② 구조 기억 (전문가의 기억)
- 패턴
- 위치 관계
- 규칙과 상태 전이
- 압축된 정보
👉 이 기억은
체감 시간을 거의 늘리지 않는다
3. 주마등 — 시간이 느려진 게 아니라 ‘기억이 폭증한 순간’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흔히 말한다.
“죽기 직전에 주마등이 스쳤다.”
“순간인데 인생이 다 보였다.”
과학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 실제 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 뇌가 생존을 위해 과거 기억을 초고속 탐색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다.
뇌는 그 짧은 시간에
‘경험 기억’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생성했다.
그래서 사건이 끝난 뒤,
- 남아 있는 기억의 밀도가 너무 높아
- 우리는 그 시간이 길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4. 그럼 왜 게임할 땐 시간이 빨리 갈까?
이건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지점이다.
“게임은 연산을 엄청 많이 하는데
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 게임은 ‘구조 기억’ 중심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 패턴 인식
- 즉각적 반응
- 감정은 최소화
- 서사는 거의 없음
그래서:
- 실시간 연산은 많지만
- 사후에 남는 경험 기억은 적다
결과적으로:
“뭐야? 벌써 3시간이야?”
5. 그럼 바둑기사는 어떨까?
이제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 나온다.
바둑기사들은 바둑을 둘 때
시간이 느리게 느껴질까?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혹은 빠르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바둑기사는:
- 감정으로 바둑을 두지 않는다
- “이 수를 두면 어떡하지?” 같은 자아 서사가 없다
- 바둑판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인식한다
즉,
바둑은 ‘경험’이 아니라 ‘상태 전이’다.
6. 그런데 왜 복기하면 다 기억할까?
여기서 진짜 핵심이 나온다.
바둑기사는:
- 순간순간을 자세히 기억하지 않는다
- 대신 판 전체의 구조를 압축해서 저장한다
비유하자면:
- 일반인:
📸 사진을 수백 장 찍는다 (감정 많음, 정리 안 됨) - 바둑기사:
🗺️ 지도 하나를 저장한다 (좌표 + 규칙)
그래서:
- 체감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 복기할 때는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7. 결국 우리는 시간을 이렇게 인식한다
이제 문장을 하나로 정리해보자.
우리는 시간을
‘실시간 연산량’으로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사후에 남은 경험 기억의 밀도’로 느낀다.
그래서:
- 주마등 → 시간은 길었다고 느껴지고
- 게임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 전문가의 작업 → 시간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8.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정리하며
어쩌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 물리적 시간은 일정하게 틱(tick)하지만
- 의식은 그 틱 위에 무엇을 남길지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 남은 흔적의 양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마무리 문장
“시간이 느려졌던 게 아니다.
기억이 많았을 뿐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우리는 그 위에 흔적을 남긴다.”“나이를 먹어서 시간이 빨라지는 게 아니다.
새로운 경험이 줄어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