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계산 이전의 세계 — 상태는 왜 미정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사물은 이미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관측할 뿐이다.”

하지만 물리학은 이 직관을 오래전에 부정했다.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위치도, 속도도, 심지어 존재 방식조차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 이상한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냥 아직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러나 ECC 가설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계산되지 않았다.


1. 미정 상태는 결함이 아니라 기본값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 상태는 흔히 “불완전한 정보”처럼 오해된다.
마치 동전이 던져져 있고, 앞면인지 뒷면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틀렸다.

동전은 이미 앞면이거나 뒷면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반면 양자 상태는 다르다.
그것은 아직 어느 쪽도 아니다.

ECC 가설에서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미정 상태는 ‘결과를 숨긴 상태’가 아니라
결과가 아직 생성되지 않은 상태다.


2. 계산은 언제 시작되는가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전, 메모리에 변수는 선언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값은 비어 있거나(undefined), 초기화되지 않은 상태다.

이 상태를 우리는 오류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이다.

왜냐하면 계산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입자가 “어디에 있을지”
빛이 “어느 경로로 갈지”
사건이 “어떤 결과로 확정될지”

이 모든 것은 선행 계산 없이 미리 정해질 이유가 없다.


3. 0.999…가 1이 아닌 이유

여기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수학에서는
0.999… = 1 이다.

그러나 물리적 관점에서 0.999…는 값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계산 과정이다.

0.9
0.99
0.999

이 연산은 언제 멈추는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계산은 출력값을 만들지 못한다.

ECC 가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선언한다.

존재란, 계산이 종료되어 출력된 상태다.

따라서 0.999…는 아직 1이 아니다.
아직 커밋(commit)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자연은 무한 정밀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무한 계산을 수행하지 않는다.

  • 유한한 시간
  • 유한한 에너지
  • 유한한 정보 처리 밀도

이 세 가지 제약은 어떤 물리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따라서 우주는 언젠가 계산을 멈추고, 결과를 확정해야 한다.

이 중단 조건이 바로 **ε(입실론)**이다.

ε은 “대충 이쯤에서 결정하자”는 임의적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발생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5. 왜 세계는 ‘아직’ 상태로 가득한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미정 상태로 가득하다.

  • 입자의 정확한 위치
  • 미래 사건의 결과
  • 인간의 선택
  • 우주의 장기적 운명

이것은 불완전함이 아니다.

오히려 효율성의 결과다.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해 둘 필요는 없다.
계산은 필요할 때만 수행된다.

컴퓨터가 모든 픽셀을 항상 렌더링하지 않듯,
우주도 모든 가능성을 항상 확정하지 않는다.


6. 계산 이전의 세계는 ‘없음’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오해를 하나 바로잡아야 한다.

미정 상태는 ‘공허’가 아니다.
‘무(無)’도 아니다.

그것은 **연산 대기 상태(pending computation)**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로 출력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양자역학도, 시간도, 의식도
끝없이 혼란스러워진다.


7. 존재는 항상 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느낀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순간은 즉각적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계산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존재는 항상 한 박자 늦다.

  • 계산이 일어나고
  • 임계치를 넘고
  • 출력이 확정된 뒤에야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실시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갱신되는 결과물이다.


마무리 — 왜 미정이어야 하는가

상태가 항상 확정되어 있다면
세계는 이미 끝난 파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실행 중이다.

미정 상태는 혼돈이 아니라
실행 중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주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계산되고 있는 과정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계산이
왜 기존 컴퓨터 구조로는 불가능한지,
그리고 왜 우주가 메모리와 연산을 분리하지 않은 구조를 선택했는지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 제14장. 일반 컴퓨터의 한계 — 왜 세계는 디지털처럼 보이는가

이제부터 진짜 우주 하드웨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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