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컴퓨터는 정확하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맞다.
컴퓨터는 정확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정확함은 언제나 한계 안에서만 성립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한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보이는 방식과 매우 닮아 있다.
1. 컴퓨터는 연속을 직접 다루지 못한다
일반적인 컴퓨터는 연속적인 값을 이해하지 못한다.
전압의 높낮이는 결국 0과 1로 해석되고,
모든 숫자는 유한한 비트 수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보자.
소수 1/3은
10진수로는 0.333… 이다.
끝이 없다.
그러나 컴퓨터 메모리 안에서는 이렇게 저장된다.
0.33333334
혹은
0.33333331
이 값은 틀린가?
아니다.
정밀도의 한계 안에서 ‘충분히 맞다’.
컴퓨터는 무한히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을 멈추고, 값을 확정한다.
2. 반올림은 오류가 아니라 설계다
많은 사람들은 반올림을 “부정확함의 흔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컴퓨터 공학에서는 정반대다.
반올림은 의도된 종료 조건이다.
- 더 계산하면 더 정확해질 수 있지만
- 더 계산하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 전체 시스템에 유리하다
이 결정은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핵심이다.
ECC 가설에서 말하는 ε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다.
반올림은 ‘대충’이 아니라
계산 자원에 대한 최적 해답이다.
3. 왜 세계는 계단처럼 보이는가
물리학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현상을 본다.
- 에너지는 연속이 아니라 양자화되어 있다
- 전자는 특정 궤도만 허용된다
- 빛은 연속파가 아니라 광자로 측정된다
왜 그럴까?
우주가 원래 디지털이어서일까?
ECC 가설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세계가 디지털처럼 보이는 이유는
연산이 항상 유한한 지점에서 종료되기 때문이다.
연속적인 가능성은 계산 중에는 존재하지만,
출력될 때는 반드시 이산적 결과로 확정된다.
4. 유한 비트는 자유가 아니라 조건이다
컴퓨터가 32비트, 64비트를 쓰는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유한 비트가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무한 정밀도를 허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메모리는 끝없이 필요해지고
- 계산은 종료되지 않으며
- 시스템은 응답하지 않는다
그 시스템은 정확할 수는 있어도
사용할 수는 없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존재는 정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해야 한다.
5. 10 % 3.15 는 왜 정확하지 않은가
컴퓨터에서 10 % 3.15 를 계산해 보면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3.15는 2진수로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계산은 근사치 위에서 이루어지고,
그 근사 위에서 나머지를 계산한다.
결과가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컴퓨터가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계도 그렇다.
불확정성은 오류가 아니라
정직한 출력이다.
6. 디지털처럼 보인다고 디지털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자.
세계가 디지털처럼 보인다고 해서
세계가 “비트로만 구성된 장난감”이라는 뜻은 아니다.
컴퓨터도 내부에서는 연속적인 물리 과정을 사용한다.
- 전압은 연속이다
- 전류는 연속이다
- 열과 잡음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출력 인터페이스는 이산적이다.
우주도 마찬가지다.
내부는 연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로 출력되는 순간,
그 결과는 반드시 구분된다.
7. 디지털 세계는 절약의 산물이다
디지털은 단순해서가 아니라
효율적이어서 선택된다.
- 적은 에너지
- 빠른 응답
- 안정적인 반복
ECC 관점에서 보면,
세계가 디지털처럼 보이는 것은
우주가 낭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무리 — 디지털은 현실의 그림자다
세계는 완전히 디지털도,
완전히 연속도 아니다.
연산 중에는 연속이고,
확정될 때는 이산이다.
이 이중성은 오류가 아니라
실행 중인 시스템의 흔적이다.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 ‘출력된’ 세계를 보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왜 이런 계산을 기존 컴퓨터 구조로는 감당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우주는 연산과 저장을 같은 자리에서 수행하는 구조를 선택했는지를 살펴본다.
👉 제15장. 메모리 구조 — 왜 연산과 저장을 분리하면 비효율적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우주 하드웨어 설계도로 들어간다.